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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한슬
에디터 한슬
·
2021-10-08
1998년부터 2021년까지, 군대 내 성소수자 생존기

2008년 9월 23일, 나는 군 정신병원에 갇혔다

1998년부터 2021년까지, 군대 내 성소수자 생존기 1편

성폭력
퀴어
차별금지법
평등법
군대
군형법92조의6

2008년, 제람은 군대에 갔다. 대부분의 또래 남자들이 그랬듯이.

그러나 제람은 '대부분'과 다른 고통을 경험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폭력과 가혹행위를 맞닥뜨렸다. 군대는 그를 보호하기는 커녕, 아웃팅하고, 군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가두고, 발달장애를 연기해야 전역시켜 주겠다고 강요했다.

이 짧은 문장만으로 제람의 경험을 압축할 수는 없다. 제람이 직접 말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편견과 혐오로 인한 끔찍한 폭력과 고통만이 아닌, 훨씬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처절한 상태에서 자기 내면과 나눴던 대화, 어떤 위협에도 나답게 살기 위해 저항했던 순간, 자신의 경험이 개인적 고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섬세하게 인지하는 마음.

그 목소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을 때 알 수 있는 숭고함과 소중함을 공유하기 위해, 제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인터뷰에는 성소수자가 군대에서 맞닥뜨린 편견, 혐오, 폭력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고, 자살 충동을 느낀 경험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제람의 경험과 시각예술가로서의 작업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분만 담으려고 노력했지만, 이런 경험을 글로 마주하는 자체가 심리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주의가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먼저 부탁 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제람입니다. '제주 사람'을 줄인 말이에요. 우리 사회에서 함께 이야기했으면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시각예술 작업으로 전하고 있어요. 제주에 찾아온 예멘 사람들, 청소 노동자, 동성애자 군인의 이야기를 꾸준히 다뤄왔습니다.

2021년 가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처벌과 감금 등을 경험한 6명의 증언을 편지 형식으로 담은 ❮You come in, We come out - Letters from asylum(당신이 들어오면 우리가 나섭니다 - 망명지에서 온 편지❯ 이라는 전시를 준비했습니다. 9월 16일부터 26일까지 서울에서 진행했고요.' 세계 커밍아웃의 날'을 기념하여 10월 11일부터 2022년 1월 9일까지 제주 도립미술관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 제주: 우리 시대에_At the same time❯에서도 전시할 예정입니다.

수백 번 말씀하셨겠지만, 군대에서 겪은 일을 증언해 주실 수 있나요?

정말 수백 번 얘기한 거 같아요. 그런데 늘 새롭게 말하는 기분이에요. 제 안에 있는 감각과 경험이지만, 또 시시각각 새롭게 발화되잖아요. 그때 그때 내 호흡으로 구워서 나오는 느낌이에요.

저는 좀 군대 가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남성성을 드러내는 말투, 행동과 거리가 멀고. 그래도 사회에서 남녀노소 어우러져 살아갈 때는, 제가 전형적인 남성성을 띄지 않더라도 괜찮았어요. 부드럽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하고, 뭐 그런 여러 가지 면들이 저의 장점이라고 사람들이 이야기해주니까요. 저도 착실하게 그런 점을 차곡차곡 강화해 나갔던 것 같아요.

군대에 가면, 그렇게 구축해 온 내가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런 말을 들었어요. "이 나라는 대통령 아들도 군대 안 가면 대통령을 떨어뜨리는 나라인데 니가 무슨 수로 안 가냐." 그래서 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죠. 군대 가기 전 날, 일기장을 봤더니 제가 그런 기도를 적었더라고요.

"하느님, 제가 낯선 환경에 가게 될 텐데, 그곳에 가더라도 그냥 저의 고유한 면들, 내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면들이 상하지 않도록,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내 존재가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절실한 기도를 썼어요.

그러고 이제 군대를 갔죠.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거랑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음... 들어가서 좀 주목받았던 것 같아요. 크지 않은 부대였고, 제가 좀 달랐다고 느꼈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다른 면들을 애써 막 감추려고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인간관계 자체가 제가 자신감 있게, 즐겁게 맺어오던 방식하고 너무 달랐어요. 게다가 그게 다름이 아니라 틀리거나 열등한 걸로 여겨지면서 조금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 쭈뼛거림들이 타겟이 되지 않았나.

인터뷰를 하는 제람.
인터뷰를 하는 제람.

처음에는 이제 여기저기 툭툭 건드리죠. 좀 대범하게 반응했어도 좋았을 텐데, 별로 그런 경험도 없었을 뿐더러. 또 이들과 24시간 함께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찌 대처해야 될 지도 모르겠는 거예요. 잠시 피할 여지가 없는 거예요. 탈출구가 아예 없어요.

본격적인 시작은 어느 날 밤 10시였어요. 밤 10시가 되면 부대 불을 다 끄고, 내무반에서 한 열댓 명이 함께 2열로 쫙 누워서 자요. 막내로 들어왔기 때문에 약간 관리 차원에서 내무반에서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 옆에서 자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좀 고약한 사람이었어요.

더듬더라고요. 더듬고. 제가 막 소스라치게 놀라고, 어어, 하고 반응을 했죠. 이건 경고의 신호이기도 하고 놀람의 신호잖아요. 보통은 멈추라는 소리거든요. 근데 그거를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재미있게 생각하는 거죠.

너무 싫었어요. 싫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런데 나의 싫음을 군대 계급으로는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강압할 수 있는 거더라고요. "멈춰. 너 지금 복종 안해? 차렷해. 움직이지 마." 지금 내 몸에 손이 들어오고 있는데? 지금 이게 뭐지? 여기서 복종하라니?

거기에서 저는 군대, 그 계급 사회의 민낯을 봤어요. 이건 복종을 가장한 희롱이고 사람을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계속 낄낄거려요. 그니까 너무 온도차가 다른 거예요. 내 안에서는 울분이 쌓이고 당황스럽고, 그런데 밖에서는 웃어요. 난 너무 속에서 뜨거운데 밖은 너무 냉랭하고 막 청량한 거예요. 그 웃음들이 이건 진짜 너무. 너무 괴로운 일이었고 제가 좀 부서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 존재가.

나중에는 괴롭힘이 다양해졌어요. 13~15개 아이스크림을 한꺼번에 다 먹으라고 하고. 만두 6개 쪄서 다 먹으라고 하고. 그러면 "아유, 못 먹겠습니다." 하거나 화장실로 뛰쳐가야 하는데, 저는 배탈날 지언정 꾸역꾸역 다 먹었어요. 나름대로 '굴복하지 않겠어.'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구더기가 들끓는 쓰레기장에 넣어 놓고 정리하라고 하거나, 화장실 정화조에 집어넣고 청소하라고 하는 건 차라리 나았어요. 왜냐하면 청소를 다 해도 저한테 냄새가 심하게 나니까 "야, 저리 가." 하면서 근처에 안 오거든요. 외면하는 게 차라리 감사할 줄이야.

언제부턴가는 잠을 자기 어려운 상황이 됐어요. 불침번을 설 때 저를 가장 고약하게 괴롭혔던 사람들이랑 조를 짜는 거예요. 그러면 엄청 또… 희롱의 말이나 그런 거에 노출됐죠.

언젠가는 탁구장에 부르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까래요. 엉덩이를 까라는 거죠. 그 사람이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그건 알 길이 없어요. 그거는 뭐 저한테 중요한 건 아니었고.

일단 나한테 받아들일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진짜 심각한 폭력을 요구하는 거잖아요. 안 한다 그랬어요. 완강하게 거부했고. 그 사람은 내 앞에서 컵라면을 먹으면서 시간을 끌고. 그러다가 해가 떴어요. 6시가 되면 저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잠을 안 재우는 거죠.

인터뷰를 하는 제람.
인터뷰를 하는 제람.

그러니까 불면증이 왔어요. 부대를 출퇴근하는 병사들한테 부탁해서 타이레놀을 사다달라 그랬어요. 심할 때는 2, 3일에 한 갑을 먹었어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잠도 안 올 뿐더러 일상생활이 너무 어려워지고. 밥맛도 없고 기운도 없고 그냥 제가 가지고 있던 그 생기가 사라졌어요.

제가 시름시름하고 있으니까 어느 날 담당 지휘관이 묻더라고요. 무슨 일 있냐고.

그런데 근데 저는 되게 자아가 많이 깨진 상태였어요.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마음의 기운이 별로 없던 상황이기도 했고. 그 때까지 제가 동성애자라고 누구한테도 말해 본 적이 없는데, 계속해서 그것과 연결하게 되는 거예요.

그들이 희롱하면서 했던 말도 "저 새끼 게이 같아." 여자 같다고 하고. 그게 군대 내에서 너무 열등한 존재의 대명사처럼 쓰이니까.

'남자답지 못하다.'는 의미가 다양할 수 있잖아요. 전형적인 남성성이 아니고 뭔가 좀 새롭다거나. '쟤는 조금 뭔가 다르다.' 할 수도 있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열등한 존재가 되니까.

너무 많이 들으면 '그런가?' 하다가도 '그렇구나'가 되기 십상이에요. 또 내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황이 아니잖아요. 너무 시달려 가지고.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나 동성애자라서 그런가 보다. 나 남자답지 못해서 여기서 이렇게 치이나보다. 열등하니까 무시당하는 거 맞지 뭐. 어떡하겠어. 화가 나지만 내 문제네.

이게 가스라이팅이죠. 집단 가스라이팅을 당한 거죠. 너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들 해요.

근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저만 당한 게 아니에요. 숱하게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을 거고, 그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아파했고, 누군가는 스스로 아프게 다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세상을 떠나기로 결정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어쨌든 지휘관이 제가 머뭇머뭇거리니까 "편안하게 말해 봐라. 아빠한테 얘기하는 것처럼 얘기해 봐라" 했는데. 제가 아빠 없이 컸거든요. 그 감각을 몰라요. 그래서 되려 물어봤어요. 아빠한테 말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고. 편안하게 믿고 말할 수 있는 거래요.

그래서 말했죠. 실은 제가 동성애자이고, 그러다 보니까 괴롭힘을 당하는 거 같다. "제가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 식으로 토로했어요. 근데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아니었던 거예요.

저는 제가 보호받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다음 날 부대가 다 알았어요.

그... (한숨) 낱낱이 다 벗겨진 느낌 있잖아요. 그 순도 높은 수치심. 너무 날것의 수치감이 막 가슴을 쳤어요. 이럴 수가 있나. 믿고 말해보라며. 이렇게 허술할 수 있나. 난 오히려 보호받아야 되는 상황인데. 싸울 여력도 없고 뭔가 다부지게 대처할 힘도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에 얘기했어요. 어머니가 부대에 오셔서 강력하게 항의했죠.

부대에서는 이렇게 요구했어요. 남은 복무 기간이 1년 반인데, 부대 내에 방이 하나 있으니까 거기에 있으면서 하루 세끼 밥 먹고 복무기간 채우고 전역하라고. 아니면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당연히 어머니는 "절대 둘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이건 너무너무 말도 안 된다." 하셨지만.

저는요. 진짜 단 1초도 거기 있고 싶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내 존재가 다 박살나서 부서질 거 같은 거예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죠. 떠밀리듯이. 저는 정신병원 간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9월 23일부터 116일 동안 군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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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거기서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잘 지내다가도 틱이 오거나, 과호흡이 오거나 그러면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진정될 때까지 잠시 머물러갈 수 있는 그런 순기능도 분명히 있겠죠. 근데 동성애자는 그곳에서도 쉴 수 없어요.

처음에 병원에 들어갔을 때, 군에서는 제가 동성애자인 걸 입증하라고 했어요. 뭐 성관계 했던 사진이나, 영상이나, 기록이나 그런 거를 내라고 했는데. 제가 또 기독교인이어서, 누구도 못 만나봤어요. 멀리서 좋아만 해봤지. 뭐, 손 잡는다? 막 뽀뽀? 허그? 안 해봤거든요. 그랬는데. 무슨 어디서 성관계한 증거를 가져오겠어요. 택도 없지.

그래서 막 생각하다가 대학교 부설 상담실에서 "동성애자라서 너무 괴로워요. 살기 너무 어려워요." 토로했던 그 기록이라도 좀 받아와야겠다 해서, 어떻게 어렵게 연락해서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로도 증명할 수가 없대요.

동생에게 저한테 동의 없이 전화해서 "너네 형 게이지?" 물어보기도 했어요. 제 동생은 몰랐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제가 동성애자라는 증명을 할 필요도 없었더라고요.

왜 동성애자임을 입증해야 되나요?

군형법 92조 6항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제92조의6(추행) 제1조제1항부터 제3항까지에 규정된 사람에 대하여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군대는 이 조항에 따라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하고, 기소하고, 처벌해왔다. 군 부대 밖에서든, 군인이 되기 전이든, 상대가 군인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개인의 성생활을 파헤쳐 '범죄 증거'로 삼았다.

군 당국에게도 어쨌든 내가 너무 뜨거운 감자예요. 뭐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상황이니. 무언가 본인들의 시나리오가 있었겠죠. 근데 그거에 제가 너무 부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거예요.

어쨌든 성행위를 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군 당국이 저를 처벌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동성애자라고 말은 하는데, 동성애 행위는 안 했고, 뭔가 증거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뭐라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제 추측이에요.

하루는 병원에서 두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방에 저를 인도하더라고요. 너무 인자한 인상의 중년 여성분이 있었어요. 그분이 저한테 했던 첫마디가 이거였어요. "너무 많이 힘들었죠?" 약간 얼음이 이렇게 녹는 느낌 있잖아요. 해빙되는 느낌이 있었던 거예요. 너무 따뜻하고. 군대에서 못 했던, 제가 군대 밖에서 나누던 그런 대화의 방식. 내 언어로 말을 걸어오니까 얼마나 반가워요. 이방인으로 있다가.

그분과 따뜻하게 대화를 나누다가 뜬금없이 막 숫자 카드를 열몇 개 펼쳐요. 유심히 보래요. 다시 접더니 기억해 보래요. 알고 보니 IQ 테스트였어요. 그 후에도 심리검사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하는데. 제가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수고하셨어요. 잘하셨어요." 이런 추임새가 내 마음에 너무 달콤한 거예요. 그 말 듣고 싶어 가지고. 저 아주머니한테 너무 사랑받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검사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머지 않아서 그 분 명의로 된 리포트를 받아봤는데. "IQ 검사 수치가 높게 나왔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보이니 군 기피 목적으로 동성애자라고 말했을 수도 있다." 우와... 이건 또 뭐야.

군대는 사람 지키는 데라고 그러잖아요.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그래서 일정 시간 동안 반드시 해야 되는 의무로서 강력하게 누군가의 인생에서 너무 소중한 시간을 군대에서 보내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나락으로 밀어내나? 그 때 처음으로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진짜 해도해도 너무한다.

그 보고서로 인해 불이익을 받으셨나요?

군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군의관과 주기적으로 상담을 했거든요. 그 분이 제가 '일관적으로 성적 지향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다'고 보고해서 그 상황을 무마시켜줬던 걸로 기억해요. 물론 제가 뭐 솔직히 동성애자라서 고통스럽겠어요? 저를 괴롭히는 상황을 만드니까 고통스러웠던 거지.

그러고 나서 또 한 번의 고비가 오는데요.

발달장애라고 해야 하나… 제가 정확한 용어를 몰라가지고. 혹시라도 무례한 게 될까 봐. 자신이 의도한 대로 손발을 잘 동작하기 어려운 분들. 예를 들면 가만히 있고 싶은데 손이 뒤틀린다든가, 아니면 환하게 웃고 싶은데 입술이 좀 어그러지면서 침이 나올 수도 있거나 그럴 수 있잖아요.

군 전역 심사에서 그런 연기를 하라 그랬어요. 연습을 시켰어요.

누가 그런 연기를 강요했나요?

군대에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근데 어쨌든 군이 한 마음 한 뜻이잖아요. 군대에서 저한테 명령한 거죠. 왜냐하면 나를 전역시켜야 되니까.

근데 못하겠더라고요. 그 자리에 딱 가니까.

제가 앉아 있고, 그 앞에 긴 테이블이 있고, 양쪽에 군 장성들이 쫙 있어요. 누군가가 신호를 주면, 내가 손이 작동되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표정도 바꾸고, 인위적으로 침도 흘리면서 연기를 해야 되는 거죠. 근데 그러고 싶지 않은 거예요.

왜 그랬나 생각해 보니까, 그 인자한 아주머니께서 다녀가신 이후로 한없이 침울해져서 '고만 해야겠다. 고만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병원 안에서 이제 좀 극단적인 시도들을 한 거죠. 그 때문에 독방에 갇혔었거든요.

제가 제 신체를 해칠 수 없으니 그냥 굶어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곡기를 끊었어요. 안 먹겠다. 근데 군 입장에서는 병원에서 죽어서 나가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수액을 꽂는데 제가 다 빼버리니까 그 다음부터는 양팔, 양다리를 묶더라고요. 침대에 수액을 꽂아야 되니까. 빛도 한 점 안 들어오고 소리도 안 들리는 새카만 방에 묶여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문득 제 안에서 스스로에 대한 물음이 들었어요.

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니?

그런 질문이 온 거예요. 제가 그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네"라고 대답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죽겠다고 했던 거는, 정말 처절하게 죽겠다고 했던 거는요. 너무 죽고 싶다는 마음이요, 한편으로는 너무 살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끊임없이 나를 배신하고, 궁지로 몰아넣고, 살아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그런 고통을 겪었고. 심지어 우리나라는 군대 문화가 되게 만연한 사회인데. 이제 어떻게 살아가지. 그런 거잖아요.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 미움과, 분노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었는데.

어쩌면 그거였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간적으로 존중할 수 있겠니?' 그런 말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지금 나의 해석으로는. '너, 살고 싶니?' 라는 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고 나서 조금 생기가 생겼어요. 완전 꺼졌던 촛불에 약간 불이 탁 켜졌다 할까. 그 새카만 독방에 있었는데요. 묘하게 그 지점이 있었어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락까지 간 이후에 점화된 작은 불꽃이었던 것 같아요.

그 쯤에 정신과 군의관이 저희 어머니를 불렀어요. 철창 너머로 어머니를 봤어요.

제람은 군 정신병원에서 어머니를 만났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니까 너무 기가 막힌 거예요.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구한테 무슨 욕을 한 번 했어, 누굴 때리기를 했어. 근데... 죽을까 마음 먹었다가 겨우 독방에서 나온, 진짜 너무 형편없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어머니를 마주한 거예요.

어머니가 주저앉는 모습이... 막상 보니까. 그 누구도 나를 여기서 꺼내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엄마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르겠어요, 아직도. 어떻게 그걸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를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 내가. 나가야겠다.

계속 공격해. 계속 나를. 뭐 부서뜨리고, 나를 파괴하려고 하고. 깨뜨리고. 그런 상황에서 와장창 다 깨져서 제가 독방까지 간 거였잖아요.

다시 나오면서 그 깨진 조각들 하나하나 소중하게 다 붙이기 시작했어요. 나 죽어나가도 누구 하나 눈도 깜짝하지 않겠지만. 나한테는 내가 너무 소중해서.

그리고 최소한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너무 소중해 가지고. 그래서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엄마, 내가 동성애자인 거 말 안 하고 그냥 조용히 착실하게 잘 살려고 그랬는데. 엄마가 너무 열심히 살아왔으니까, 그 삶에 약간 보답이 되고 싶기도 했고. 엄마 인생에 막 엄청 큰 다이아는 아니어도 좀 반짝이는 보석 같은, 착하고 좋은 아들로서 살고 싶었는데.

엄마,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내가 엄마한테 동성애자라고 말했어. 내가 살려고.

어머니가 고맙다고 그러셨어요. 네가 너를 사랑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너를 지킬 힘을 가져줘서 고맙다고. 아, 그 때부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는데, 좀 사는 것처럼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했어요. 목숨만 붙어 있는 거 말고 나답게 살아야겠다.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흔들릴 순 있겠지만, 나답게.

그래서 군에서 시킨 연기는 못하겠더라고요. 전역 심사에서 아주 또박또박 말했어요. 저는 제가 아닌 모습으로 저를 말하고 싶지 않다고.

원하던 답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전역 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군 병원에 돌아왔죠. 그것에 대한 질책이 있었고, 두 번째 전역 심사가 열렸어요. 똑같이 가서 그 연기를 해야 되는 건데요. 안 했어요.

그 자리에서 군대 쪽 사람 중에 누군가가 그랬어요. "아니, 시키는 대로 하면 살려서 내보내주려고 그러는데, 너 군대에서 이렇게 죽어 나가면 군견값도 못 받아. 너 개 값도 못 받아. 의문사로 나가면." 그런 말 들을지언정 안 했어요. 그렇게 계속 하염없는 시간들이 지나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저를 데리러 오신다는 거예요. 무슨 영문인가 했어요.

집에 갈 수 있대요. 군 전역할 수 있대요.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군에서 연락이 간 거예요. 당신 아들 살려서 내보내 줄 테니까, 군과 정부를 상대로 어떠한 손해배상 청구나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어머니가 서명하셨고, 군대를 나올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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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복무한 사람들은 병역증명서를 손쉽게 뗄 수 있어요. 병역증명서에 그렇게 써있더라고요. '군 복무 부적합'. 군 정신병원에서 나올 때도 진단서에 병명이 써 있었거든요. '히스테릭성 인격 장애', '자아 이질적 동성애'. 이게 제 병명이더라고요.

제가 검색해 봤어요. 히스테릭성 인격장애가 뭔가. 제가 파악하기로는 사람들이랑 원활하게 대화를 쭉 이어나가기 어려운 그런 상태 같더라고요. 근데 저를 만나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 대화 잘하거든요. 그래서 그거는 무효예요. 제 삶으로 증명해냈죠.

두 번째는 자아이질적 동성애인데. 자신이 동성애자인 게 아무렇지 않고 잘 받아들였으면 '자아동질적 동성애'라서 병이 아니고요. 내가 동성애자인게 너무 괴로우면 자아이질적 동성애라서 병이라는 거예요.

그 병을 내가 만들었어? 사회가 만들었잖아요. 군대가 만드는 거잖아요. 그럼 나도 괜찮은 거네.

심지어 지금은 저 자아동질적 동성애라고 말하는 게 더 가까울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도 무효.

제가 군 복무 부적합이었을 수는 있어요. 왜냐하면 군이 너무 병들어가지고. 그 억압적이고 왜곡된 계급 구조랑 마치 신분제 같은 그런 사회. 저는 거기 적합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죠.


제람은 군대에서의 기억을 고통으로만 놔두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5인의 증언까지 함께 담아 시각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전시와 워크숍을 통해,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들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왜 시각예술을 선택했을까? 다시 떠올리는 게 괴롭지 않았을까? 군대를 나온 후, 제람의 이야기를 2편에서 계속 읽어 보자.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ㆍ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정신건강 상담전화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청소년 모바일 상담 '다 들어줄 개' 어플, 카카오톡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민단체 군인권센터(02-7337-119)는 군대 내 인권침해, 가혹행위,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전문적인 상담, 법률지원, 의료지원을 제공합니다.

이 콘텐츠는 퀴어 데이팅앱 잭디(Jack’d)에게 일부 제작비 후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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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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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부터 2021년까지, 군대 내 성소수자 생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