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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민
에디터
·
2022-03-18
결혼 안 한 엄마들

미혼모, 베이비박스, 입양을 검색해본 적 있나요

[결혼 안 한 엄마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랑 너무 같이 살고 싶었어

가족다양성
비혼
입양

아이를 낳기까지

다큐멘터리 프로덕션에서 자료 조사원으로 일한 지 3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 스물여덟 살 김보영씨(가명)는 몸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신호가 있긴 했다. 그동안 자꾸 졸립고 몸이 무거웠지만, 일 때문인가보다 했다. 일주일에 퇴근을 두 번밖에 못 했다. 늘 하던 대로 밤새도록 일해서 몰랐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다보니 월경 불순도 잦아서 몸의 변화를 더 몰랐다. 보영씨는 5개월이 되어서야 임신 사실을 알았다.

"5개월이면 임신 중기예요. 절반 정도니까 아이가 많이 자랐을 때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죠. 태동도 느낄 때고요. 바로 병원으로 갔어요."

임신 사실을 확인한 보영씨는 곧바로 미혼모, 여성긴급전화, 입양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 전화를 돌렸다. 입양기관의 사회복지사가 말했다. "이 정도면 아이가 많이 자랐기 때문에 중절은 불가능해요." 그땐 2014년으로, 당시에는 임신중단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암암리에 수술을 한다고 해도 산모가 위험하니 방법은 두 가지뿐이라 했다. 낳아서 직접 키우거나, 입양을 보내거나.

기관에선 미혼모를 위한 출산 지원 시설도 일러주었다. 홀로 출산을 준비하는 것보다 시설에 입소해 도움을 받는 게 산모의 안정을 위해서 더 나을 것이라고 했다. 보영씨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여태 살아온 동네에서 자신은 물론 자신의 엄마까지 겪을 곤란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꼬마 시절부터 여기서 살았어요. 결혼 안 했는데 임신한 채로 돌아다니는 걸 보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까. 꼭대기층에 살았는데, 누가 볼까봐 임신한 몸으로 15층까지 계단으로 오르내리면서 깨달았죠. 시설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출산에 임박하면 신속하게 병원 이동을 도와준다고 했으니까요."

대개 시설에선 의식주가 해결된다. 출산 비용을 지원하고, 출산 후에도 사회복지사가 동행해 산모의 정기 검진을 관리한다. 입소자는 비슷한 시기에 찾아온 이들과 정서적인 유대를 쌓고, 어깨 너머로 육아법을 배우기도 한다. 홀로 출산을 준비하는 여성에게 이러한 지원이 '보호이면서 또 격리이구나' 하고 보영씨는 생각했다.

시설과 연계된 기관에선 출산 직후에 바로 입양하는 방법도 있다고 알려줬다. 보영씨도 입양을 고려해봤다. 보내도 후회할 것 같았고, 혼자 아이를 키워도 후회할 것 같았다. 각각의 장단점을 써보기로 했다. 한부모가정을 위한 여러 가지 지원 사실도 나열해봤다. 그렇게 글로 정리한 끝에 보영씨는 입양보다 직접 키우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영씨가 머리에 손을 얹었다. 마스크, 회색 셔츠, 검정색 외투를 착용했다.
보영씨가 양손을 모았다.

그런데 예정일이 20일쯤 임박했을 때였다. 한밤중에 눈물이 쏟아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잘 키워보자고 마음을 먹었는데, 자신이 "죄인"이 된 것만 같았다. 새벽 두시에 서울 난곡동의 베이비박스에 전화를 걸었다. 베이비박스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아기를 키울 수 없는 산모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안전하게 두고 갈 수 있는 곳이다. 24시간 전화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상담사는 펑펑 우는 보영씨를 차분하게 설득했다. "만약 아이를 키우다가 힘들면 그때 마음을 바꿔도 돼요. 비난하지 않고 존중할게요. 대신 키워보시겠다면 최대 2년간 분유와 기저귀를 지원해줘요. 해보지 않으시겠어요?" 보영씨는 설득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이었다고 보영씨는 말한다. 지금의 경제력으로 한 생명을 평생 책임지고 키울 수 없을 테니 바로 입양을 보내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이를 낳았다.

입양 숙려 기간이 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일주일은 엄마랑 같이 있어야 한다. 7일이 지나야 입양 서류를 쓸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보영씨는 약속한 일주일이 지나 서류에 사인을 하러 갔다. 그때 관계자가 물었다. "평생 다시는 안 찾을 자신 있는 거지요?" 한 번 더 물었다. "결정하셨나요?"

보영씨는 그 질문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전까지는 몰랐지만, 다른 이에게서 그런 질문을 들으니까 어마어마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 일주일간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했던 시간도 떠올랐다.

'지금 아이를 보내면, 나는 미련이 없을까? 중간중간 소식을 듣고 싶어질 텐데, 나는 아이를 평생 잊고 살 수 있을까?'

보영씨는 아이를 입양보내기 위해 사인을 하러 갔다가 결국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의 이름은 재은(가명)이고, 올해 여덟 살이다.

"모든 엄마가 그럴걸요. 아이 키우면서 내가 무언가 해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때 돼서 예방접종 잘 맞췄을 때, 이유식 먹던 아이가 뭐든 씹기 시작할 때 그랬어요. 아이한테 필요한 걸 어떻게든 찾아서 다 해줬을 때요. 덕분에 아이는 건강하고 저는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거죠."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에 취업하기까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회사에서는 보영씨를 권고 사직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랬다. "밤샘 근무가 많은 일터라 이젠 일하는 게 쉽지 않을 테니 쉬는 게 어떻겠느냐." 직업적 열정이 다 식은 때라 털고 나왔지만, 보영씨는 배려받는다기보단 배제당한다고 느꼈다.

출산 직후 보영씨에게 약 5년간 아이 기저귀부터 이유식, 옷, 도서 같은 생필품이 주어졌다. 막 태어난 아이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이다. 그보다는 적지만 엄마를 위한 지원도 있다. 엄마가 요가와 꽃꽂이 같은 새로운 배움 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끔 돌보미가 아이를 봐주는 시간이다. 이런 지원은 지자체 및 민간 기관이 한다. 누가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생계 활동을 하면서 갓난아이를 돌볼 수 있을까.

보영씨의 뒷모습. 머리를 묶었다. 마스크와 귀걸이를 착용했다. 맞은편에는 닷페이스 에디터 민이 대화에 임하고 있다.

출산 뒤 1~2년 동안 24시간 육아에 발이 묶였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때가 되자 일을 구하려 했지만, 아침 아홉시에 아이를 맡기고 오후 세시면 찾아와야 하니 '나인투식스' 직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아이가 자는 동안 돈을 벌기로 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쿠팡 배송센터에 취직했다. 밤 열한시부터 새벽 여섯시까지 일했지만 그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밤낮이 바뀌는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보영씨는 그 이후로 이어진 일들을 나열했다. 심리센터의 사무직, 녹즙 알바, 내시경 센터 의료 장비 소독 업무. 근무 시간이 짧거나, 계약 기간이 짧거나, 최저시급을 지급하는 단순노무직이었다.

"일하러 가면 학사에 석사까지 한 엄마들 많아요. 아이를 키우느라 시간제 아르바이트에 머무르고 있는 거죠. 생산 능력이 있는 젊은 사람들이 단순노무직에서 일하고 있는 건데, 국가적으로도 손해 아닐까요."

방향을 돌려 공부로 답을 찾기로 했다. 돈이 들고 시간이 드는 일이지만, 아이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보다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때 국가장학재단의 등록금 교육비 지원 항목을 발견했다. 국가가 개인의 소득을 파악하고 장학금을 제공하는 교육 복지 정책이다. 보영씨는 자신이 소득10분위 대상자로서 사이버대학교 등록금이 전액 지원된다는 것을 알았다. "무료고, 공간 제약이 없으니까 낮에 일과 육아를 하고 밤에 공부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보영씨는 아세안지역경영학부의 동남아시아 전공을 택했다. 전략적인 선택이다. "나이가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도록 희소한 분야를 선택했어요." 서른 살에 시작한 공부다. 아이가 커서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한다면 30대 중반일 텐데, 남들 안 하는 공부를 해놔야 더 나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휴학을 세 번 하는 바람에 4년 예정된 과정이 6년 걸렸다. 아이가 아파 돌보느라 수업에 한 번 빠지면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아이가 안 자는 날에는 한참 씨름하다가 자신도 잠들어버려 복습을 못했다. 그래도 F학점만 면하자는 생각으로 잠을 줄이고 수업에 임했다. 일요일만큼은 자신을 위한 시간으로 정하고 아이 돌봄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배운 걸 다시 훑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사회 초년생 시절에 '열정페이' 받으면서 밤낮없이 일할 때보다 더 열심히 살았어요."

그 결과 보영씨는 최근 말레이시아로 해외 취업을 앞두고 있다. 한국 교민을 상대로 웹서비스와 관련한 CS 업무를 하게 될 예정이다. 한부모로서 경력 단절 7년 만에 이룬 일이다.

보영씨는 몇 달 뒤 아이와 함께 비행기를 탄다. 아이에게 곧 영어를 쓰면서 새 친구들과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아이는 그게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아직 실감하지 못하지만, 보영씨가 유튜브로 말레이시아의 풍경을 보여줄 때면 호기심을 보인다. 그는 불편한 변화에도 대비하고 있다. 교민들의 적응 실패담을 살피고, 현지 여성들과 'SNS 친구 맺기’를 하면서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환경을 헤아리는 중이다.

보영씨의 거실 풍경. 다양한 장난감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보영씨의 아이.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다. 빨간색 셔츠, 얼룩무늬 바지를 착용했다.

아이라는 선택

보영씨의 아이 이름은 재은(가명)이다. 같이 살아본 적 없는 아빠가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이다. 성도 아빠 성을 쓴다.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 신고를 해야 하는데, 출산 무렵 시설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제한되어 때를 놓칠 뻔했다. 기간 안에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기에 아이 아빠한테 이름이라도 지어달라고 부탁해서 이름을 받았다. 그땐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했지만, 재은이와 살면서 보영씨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이렇게 자랑스럽게 키우고 있는 아인데, 당연히 내 성을 써야 하는 거 아니야?’

보영씨는 자신의 엄마와 오빠와 함께 재은을 키웠다. 현재 그는 성본 변경을 준비하고 있다. 아이의 성을 엄마의 성으로 바꾸는 일이다.

언젠가 재은이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나는 왜 아빠랑 같이 안 살지? 왜 우리 집엔 삼촌이랑 할머니만 있어?" 불만이나 슬픔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다섯 살 아이의 해맑고 순수한 의문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너랑 너무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랬어."

할머니의 이 적절한 대답은 오은영 박사가 TV에서 가르쳐준 것이다. 보영씨는 이럴 때마다 미디어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실감한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좋은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울 수도 있고, 다양한 가족 형태를 접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도 있다.

보영씨가 자신의 아이에게 검정색 헬멧을 착용해주고 있다.
보영씨와 아이가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래서일까. 보영씬 미디어의 요청에 직접 응한 적이 있다. <피부색깔=꿀색>(2014)을 연출한 정 에넹 감독이 보영씨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정 감독은 태어난 직후 서울 남대문 시장에서 발견되어 유럽으로 입양되었다. 50대가 되어 자신의 삶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한국에 왔을 때 보영씨를 만났다.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한 사람이에요. 저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상상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해줬어요.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혼자서 양육해줘서 고맙다면서요. 그때 딱 실감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키우길 잘했다고."

보영씨는 자신의 아이를 입양 보내지 않았지만, 그렇게 결정하는 부모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때로는 행동했다. 베이비박스에 들어온 아이를 돌봤다. 한때 자신이 가려고 고민했던 곳이다. 한국에서 운영되는 베이비박스는 서울 관악구의 주사랑공동체교회와 경기 군포시 새가나안교회에 있다. 보영씨는 여기서 여러 엄마들을 만났다. 그 만남은 길지 않았다.

"제주도에 사는 스무 살 엄마가 있었어요. 신생아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다고 해서 아이 안고 배를 타고 인천까지 왔어요. 거기서 지하철 타고, 버스 갈아타고, 언덕 가파른 서울 난곡동까지 왔어요. 아이 목숨을 살리려고 그 먼 길을 온 거예요."

"우리는 그 엄마가 아이를 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베이비박스라는 시스템이 없었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베이비박스에 아이가 도착하면 벨이 울린다. 그러면 "비상 사태처럼" 직원과 봉사자들이 뛰어나간다. 아이를 확인하고 엄마에게 설득하기 위해서다. 보영씨는 그렇게 뛰어나갔는데도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핏덩이 아이만 교복에 싸여 있었다. 보영씨 경험대로라면 출산 직후엔 도저히 달릴 수가 없는데, 모든 봉사자들이 붙잡으려 뛰었지만 아무도 그 엄마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베이비박스 온라인 카페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보영씨는 이런 내용으로 기억한다.

"어제 선생님들이 저와 대화하려고 붙잡으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를 부르는 소리도 다 들었습니다. 아이를 잘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마음이 약해질까봐 그랬습니다. 미안합니다…"

보영씨도 그 문턱에 서봤다. 결국 아이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지만 그와 다른 선택을 하는 엄마들의 심정을 모르지 않는다. 출산 전후로 원망과 절망, 희망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가장 강렬했는지를 내가 물었을 때 그는 희망이라고 답했다. 다만 그 희망에 대해서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베이비박스는 24시간 전화 서비스가 운영돼요. 119처럼요. 그건 위기의 여성을 구하는 전화예요. 제가 그날 밤 전화를 걸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지도 몰라요. 정말 중요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이고 지방에 사는 경우라면 더더욱 절실할 거고요."

보영씨는 자신이 경험한 삶 이상으로 자신이 관찰한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이 힘들게 자립한 이야기보다 각각의 사정으로 그럴 기회를 만들지 못한 엄마들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새삼 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보영씨를 만나 그런 이야기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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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
    취재, 작성
  • 조아현
    조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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