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시설 안으로 같이 들어가봅시다

2021년 06월 28일
에디터 한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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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의 이름은 향유의집. 하지만 이 곳은 '집'이 아니다. 중증장애인 '시설'이다.

2021년 3월 9일부터 향유의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한때는 120명이 넘는 중증장애인들이 살았다. 가장 오래 살았던 사람은 설립 때부터 닫을 때까지 37년 간 이 곳에 머물렀다.

2008년 한규선 씨가 처음 탈시설을 선택한 이후, 모두가 이곳을 떠났다. 가족과 함께 살거나, 저소득・장애인을 위한 공공임대주택 제도를 통해 자기만의 집을 찾아갔다.

비바람을 막아 주고, 때 되면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것이 집의 조건이라면, 향유의집은 집이었다.

그것만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장애인 '시설'은 정말 '집'이 될 수 있을까? 향유의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질문을 던져 본다.

30미터가 안 되는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 양 옆에 방이 5개씩 늘어서 있다. 방 한 칸은 4~5평 정도. 장롱과 TV가 있다.

이런 방에서 많게는 8명, 적게는 3명이 함께 생활했다. 방문은 특별한 요청이 없으면 항상 열려 있었다. 직원들이 복도를 걸어가며 한 눈에 방 안 사람들의 모습을 파악하기 편하도록.

여기서 20년 간 살면서 한 번도 마음이 편했던 적이 없어요. 같은 형제끼리도 방을 같이 쓰면 사생활을 지킬 수 없는 건데, 남남이 한 방을 써야 하잖아요.

한규선 씨는 1989년 처음 시설에 도착했을 때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생각했다. "말 잘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짓눌려 살아야 했어요." 뇌성마비 중증장애인인 한규선 씨는 언어 장애가 있다. 입소한 사람에 비해 직원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비교적 자신의 요구를 활발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신체장애인이 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받기 '유리'했다.

그러다보니 시설 직원은 아니지만 방마다 '통제력'을 가진 사람이 생기기도 했다. "처음 들어간 방에서는 (그런 사람이) 누워 있는 사람에겐 간식을 안 주더라고요. 음식도 형편없이 나왔었는데. '여기서는 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 대접을 못 받겠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당시 시설 운영자들은 시설 사람들 간의 권력관계, 차별, 갈등을 해결하기보다 방치하고 조장했다. "입소비 내고 들어 온 사람들에게만 휠체어를 배정하고, 입소비 없이 들어온 사람들은 기어다니라고 했어요."

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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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의집 화장실은 독특하다. 방 두 개 사이에 공동화장실 겸 욕실이 한 개 있다. 원래는 방 한 개에 작은 화장실이 1개 딸린 구조인데,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너무 좁아 양 방의 화장실 2개를 합쳐서 큰 화장실 1개로 설계했다. 화장실마다 좌변기가 하나 있다.

양쪽 방 인원이 열 명을 넘어갈 때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한 번 변기를 차지하려면 몇 시간씩 기다릴 때도 있었고, 아무도 없는 새벽을 기다려서 볼일을 보기도 했다.

20년간 시설에서 살았던 한규선 씨는 더 심한 일도 기억한다. "자격이 안 되는 직원들도 많았어요. 말 안 듣는다고 목욕탕에 집어넣어 놓고, 말 안 듣는다고 밥 안 주고."

생활

전반적인 생활이 다 이상했어요.

호영선 씨는 뇌에 이상이 생겨 중증 뇌병변 장애인이 되기 전까지는 시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2005년, 이 곳에 입소하고서야 우리나라에 이런 시설이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교도소 같은 구조의 건물에서 시간 되면 자야 하고, 시간 되면 눈을 뜨고, 군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배식 판에 음식을 받아서 먹었다. 휠체어를 개조해 만든 밥 수레가 배식 판을 방으로 실어 날랐다.

휠체어를 개조해 만든 밥 수레.
휠체어를 개조해 만든 밥 수레.
시설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에 누워 TV를 보며 하루를 보냈다.
시설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에 누워 TV를 보며 하루를 보냈다.
침대가 있는 방은 앉지 못하는 와상환자들이 주로 사용했다.
침대가 있는 방은 앉지 못하는 와상환자들이 주로 사용했다.
지루한 일상이죠. 매일 눈 뜨면 똑같은 일을 해야 하고. 해 떨어지면 '취침시간이다, 자야지.'

호영선 씨는 특히 외출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불만이었다. 향유의집이 있는 경기 김포시 양곡은 2010년대부터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까지 논밭 외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이었지만, 가끔 오일장이 섰다. 그러나 규정상 동행할 사람이 없으면 외출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직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외출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설에 갓 들어왔을 때 27세였던 한규선 씨는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운동을 하거나, 컴퓨터를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다닌 적이 없어 중학교 1학년 영어책을 복사해 공부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때는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죽어야 나가는 곳이 시설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꿈이 없는 곳이에요, 시설은.
일정이 적힌 달력. 단체 생활은 정해진 일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해진 하루가 10년, 20년의 삶이 된다.
일정이 적힌 달력. 단체 생활은 정해진 일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정해진 하루가 10년, 20년의 삶이 된다.
진정서와 진정 봉투. 인권침해나 학대가 발생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정서와 진정 봉투. 인권침해나 학대가 발생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5년간 시설에서 생활하며 호영선 씨는 시설 측의 지시에 따라 이 방, 저 방으로 옮겨 다녔다. 그때마다 호영선 씨가 돌볼 사람을 함께 배정했다. 인력이 부족해 거주인들이 서로를 돌보도록 한 것이다. 본인도 중증장애인이지만, 마비되지 않은 한 손으로나마 이부자리 개고 까는 것, 옷 입는 것, 식사를 주로 도왔다.

"내가 선생 노릇, 사회복지사 노릇을 겸하면서 하는 거죠."

한규선 씨도 새벽 5시에 일어나 한방을 쓰는 사람들의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곤 했다. "제가 그때는 혼자 침구를 정리할 수 있었거든요. 비장애인은 5분 걸릴 걸, 나는 30분이 걸리니까 일찍 일어났어요." 몸이 더 불편하거나 인지 능력이 부족해, 자는 동안 대소변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불까지 치웠다.

시설 생활을 돌이켜 볼 때, 호영선 씨는 함께 지냈던 사람들의 마지막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결국은 15년 동안 내가 보살폈던 친구들은 다 하늘나라로 갔어요. 성질들이 급해서." 대부분 건강 악화 때문이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을 기다리는 동안 2층 가장 구석진 방에 잠시 시신을 안치하고, 향을 피워두곤 했다.

아이고, 가슴이 아픈 정도가 아니지. 같이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영구차에 실려서 사진만 빙빙 도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20년간 시설에서 살았던 한규선 씨도 숱한 죽음을 보았다. 1년에 평균적으로 한두 명, 많게는 10명까지. 마음이 아팠지만, 여러 번 반복되니 무뎌지기도 했다.

영구차: 장례식 때 시신을 운반하는 자동차.

좋은 시설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한규선 씨가 시설에 살았던 1989년부터 2008년까지 시설을 운영했던 재단 이사장의 가족들은 횡령 범죄로 고발당해 해고되고 법적 처벌을 받았다. 당시 이 시설의 이름은 향유의집이 아니라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이었다.

2007년 서울시 특별감사와 내부 고발을 통해 장애인 앞으로 주어지는 장애수당, 구청이 명절 때 지급하는 상품권, 국고보조금으로 지급되는 종사자인건비, 관리운영비, 생계비 등을 횡령한 범죄가 드러났다. (국가에 등록된 장애인 시설은 100% 국고보조금으로 운영된다.)

석암재단 이사장 일가가 법적 처벌을 받은 뒤, 시설을 운영할 새로운 이사회가 꾸려졌다. 공익적인 목적으로 장애단체 활동가, 사회복지계 교수들 등이 참여했다. 석암재단은 프리웰재단으로, 시설 이름은 향유의집으로 바뀌었다.

'나쁜 비리 운영자'는 사라졌다. 그러나 한규선 씨는 시설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규선 씨 뿐 만 아니라, 향유의집에서 살던 8명도 시설보다는 차라리 노숙이 낫다며 향유의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숙 투쟁을 했다. 왜 그랬을까?

한규선 씨는 오히려 되물었다.

PD님은 아무 이유 없이 집단생활을 하라면 하시겠어요?

"안 하겠죠. 저는 학교 다닐 때도 한시라도 빨리 끝나기를 바랬는데요."

"그러니까요. 장애가 있다고 한 곳에 몰아 가두고, 집단생활을 강요하는 건 옳지 않아요. 장애인들도 지역사회에서 살아야 해요.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 다른 시설에 비하면 여기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설이라고 했어요. 그래도 인권침해는 일어났고, 비리도 일어났죠. 시설 자체가 인권이 지켜질 수 없는 구조예요. 저는 시설을 '인간 농장'이라고 생각해요. 사람 수대로 국가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운영하잖아요. 결국 시설의 이익을 위해서 농장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것처럼 장애인들을 사육하는 거죠."

향유의집을 이어서 운영하게 된 프리웰재단 김정하 이사장도 탈시설 욕구에 공감했다.

"처음 장애인 인권운동을 할 때는 비리, 인권침해 제보가 들어온 시설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문제 있는 시설만 솎아내면 된다고요.

그런데 끝이 없는 거예요. 미인가시설, 개인사업자, 종교 시설, 대형 법인... 운영 주체를 가리지 않고 똑같은 문제가 계속 발생해요. 인권침해를 저지른 이사장이 나가고 나면, 아들이 이어서 이사장을 하고... 적은 인원이 많은 수의 장애인들을 돌보느라 제대로 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고요. 좋은 시설, 나쁜 시설이 있는 게 아니라 시설이라는 구조 자체가 가진 한계를 절감했어요."

향유의집 같은 장애인 거주 시설은 전국에 1,517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3만여 명이다(2019, 토지주택연구원, '장애인 자립생활 주거지원 방안 연구').

중증발달장애인 서지원 씨의 어머니 임현주 씨는 10년 전 '좋은 시설'을 찾았다고 생각해 아들을 맡겼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혼 후 생계를 위해 경제생활을 하면서, 특수학교를 졸업해 있을 곳이 없는 서지원씨를 동시에 돌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혼한 남편의 지인에게 소개 받은 시설은 당시 새로 지은 건물에 대전광역시 도심에 있어 위치도 좋았다. 특수학교에 다녔을 때처럼 잘 적응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설이라는 구조 자체의 한계가 서지원 씨의 삶을 갉아먹었다. "한 명당 굉장히 많은 장애인들을 돌봐야 하니까, 우리 지원이처럼 적극적으로 의사 표현을 못 하는 사람들은 물 한 번 먹기가 어려워요."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으니 자폐적 성향이 생겼다. 땅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뱅글뱅글 돌았다. 이 행동을 지속하자 시설에서는 무릎을 굽힐 수 없도록 보조기를 채웠다. 손을 입에 넣고 빠는 버릇 때문에 냄새가 나면, 닦아주기 보다는 팔꿈치에 보조기를 채워 팔을 굽힐 수 없게 했다. 이름을 부르거나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다 보니 8년 만에 허리가 90도로 굽었다. 음식에 대한 호불호를 명확히 표현할 수 없다 보니 몸무게가 28kg까지 빠졌다.

임현주 씨는 처음에는 시설 직원들의 선택을 이해했다. "저도 지원이랑 20년을 같이 살았잖아요. 항상 아이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선생님 한 분이 여러 사람을 돌보려면 힘들지. 이 정도는 용인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했어요." 한 편으로는 이런 처우에 대해 항의했다가 서지원씨가 시설에서 쫓겨나게 되면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는 절박함도 있었다.

"시설은 장애인을 돌보는 선의의 단체가 아니고, 자원봉사 단체도 아니에요. 어쨌든 이익을 얻는 영리단체잖아요. 그래서 중증장애인에게 그렇게 너그럽지 않아요. 최대한 움직이지 않는 아이로 만들려고 하죠. 종사자들을 많이 채용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요."

서지원 씨는 시설에서 음식을 급하게 먹는 버릇이 생겼다. 2020년, 기도로 음식물이 넘어가 흡인성 폐렴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시설은 퇴원한 서지원 씨를 다시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산골에 있는 조용한 데로 옮겨라"는 말까지 들었다. 다른 시설을 알아보느라 연락하게 된 장애인 인권단체에서 긴급 쉼터와 지원주택 제도를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시설을 나왔다.

탈시설 후의 자유

침대 머리맡에 사진과 그림 액자가 놓여 있다. 시설에서는 개인 사진을 방에 걸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하고, 언제 방이 바뀔 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침대 머리맡에 사진과 그림 액자가 놓여 있다. 시설에서는 개인 사진을 방에 걸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하고, 언제 방이 바뀔 지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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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선 씨는 장애수당을 모아서 마련한 200만원을 가지고 시설을 나왔다.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지원하는 그룹홈에 2년 정도 살다가, 2010년 국민임대주택에 당첨돼 11년 째 같은 집에 살고 있다.

생활에 필요한 도움은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를 통해 받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장애 정도에 따라 활동보조인을 고용할 수 있는 시급에 해당하는 바우처를 일정량 지급한다. 이를 통해 고용된 활동보조인들이 집을 방문해 가사, 이동, 사회생활 등을 돕는다.

침대 머리맡의 액자 속에 활동지원 선생님 중 한 명이 그려 준 한규선씨의 웃는 얼굴이 있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베란다에는 화분이 많다.

처음 시설을 나올 때는 고민이 많았다. 시설 밖에서 혼자 생활해 본 적이 없으니 두렵기도 했다. '요양원에서 20년을 살았는데 어디서 못 살겠냐'는 생각으로 나왔다.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지낼 곳은 있었지만, 그 때만 해도 활동지원을 한 달에 130시간밖에 받을 수 없었다. 하루에 4~5시간에 불과해 중증장애인인 한규선 씨의 생활에는 불편함이 많았다.

몸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한규선 씨에게 집은 안식처다. 온전히 내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편안한 곳이죠. 아무한테도 간섭 안 받고. 내가 20년 간 꿈꾸었던 그런 곳이에요." 밤 늦게까지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게 취미다.

지역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의 비리를 폭로하고 탈시설 투쟁을 했던 동지들과 함께 세운 김포장애인자립지원센터의 초대 소장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부소장을 맡고 있다. 다른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돕고 있다.

한규선 씨는 시설을 나왔다는 사실을 2년 반 동안 가족들에게 비밀로 했다. "집에서는 제가 계속 요양원에 있는 줄 알았죠. 반대하고, 걱정할까 봐 얘기를 안 했어요." 이사 온 지 1년이 지나서야 가족들을 초대했다. 어머니는 항상 아픈 손가락이었던 막내아들의 '집'을 보고 울면서 좋아하셨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죽는다"가 말버릇이던 어머니는 한규선 씨의 자립 생활을 보시고 90세에 돌아가셨다.

"지금 국회에서 논의 중인 탈시설지원법이 빨리 제정됐으면 좋겠어요. 법적인 근거가 있으면 좀 더 많은 분들이 탈시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시설에 살고 있는 장애인들에게는 용기를 가지고 나와도 된다고 말씀 드리고 싶어요. 제가 이렇게 혼자 살아도 가족들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해봤거든요."

한규선 씨처럼 장애인들의 탈시설을 제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정부에서도 응답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2019년부터 지원주택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공공임대주택과 주거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호영선 씨는 2019년 향유의집에서 지원주택으로 이사했다. 이사가 다가올수록 설렘과 두려움으로 잠이 오지 않아 며칠 밤을 꼬박 새웠다. 낯선 지역에서 부대끼고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은 이사한 지 하루 만에 모두 해소됐다. 별거 없었다. 호영선씨는 자신의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쳤다. "프리덤! 나는 자유인이다!"

호영선님 집
호영선님 집

"한 마디로 너무 좋아서요. 뭐든지 다 자유롭잖아요. 내 방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거실이 있고, 화장실 이용하고 싶으면 바로 왼쪽으로 돌아가면 화장실이고. 전동휠체어를 타고 누가 문만 따주면 바로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고. 마음이 많이 '업'됐어요."

'문을 따 주는' 사람은 활동 지원 서비스를 통해 고용된 활동보조인이다. 빌라 뒤쪽 골목으로 나가면 원하는 상점이 다 있다. TV 홈쇼핑도 종종 하지만 직접 물건을 보고 고르는 게 좋다.

"내 집에서는 내 맘대로 할 수 있잖아요. 옷을 홀라당 벗고 있어도 누가 뭐라 그럴 사람 없고, 보는 사람 없고. 밤새도록 자 놓고도 낮잠을 마냥 즐길 수 있고. 제 인생의 캐치프레이즈가 구속 없이, 간섭 없이, 내 마음대로 편히 살다 이 세상을 마치는 거예요."

임현주 씨는 처음 지원주택 사업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해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자리가 적어 선정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고, 임대료와 공과금, 생활비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시설에서는 부모의 부담이 월 10여만 원에 불과했다. 국가에서 시설 운영자 측에 시설운영비와 생활비를 보조해주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살림을 갖추는 것부터 시장 보는 것까지 돈이 쑥쑥 빠져나갔죠. 그런데 한 3개월이 지나고 어느 정도 정착이 되니까, 부담이 크지 않더라고요. 지원이한테 나오는 장애인연금도 있고, 임대료도 국가에서 어느 정도는 시설비로 지원해 주거든요. 경제적인 문제로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시설을 나온 지 2주 만에 90도로 꺾어졌던 서지원 씨의 허리가 펴졌다. 식사를 급하게 먹는 버릇도 사라져 흡인성 폐렴이 재발할 걱정을 덜었다.

임현주 씨가 인터뷰를 위해 3주 만에 서지원 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서지원 씨는 현관에 나와 환하게 웃었다. 시설에 살 때는 달랐다. 임현주 씨가 방문하면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신발을 신고 차에 타기도 했다. "이제 제가 좀 오래 있으면 가라고 해요. 저를 현관에 데려가서 뽀뽀 쪽하고 탁 밀어버린다니까."

"우리가 아무리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고 해도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늦춰지고 당겨질 수 있잖아요. 반찬을 내왔는데 아이가 먹기 싫고 밀쳐 내면 다른 거 갖다주기도 하고. 활동지원 선생님이 언제 오시는지, 뭘 해주시는지, 다 지원이의 컨디션에 맞춰서 움직여요. 시설은 안 그렇거든요.

여기는 지원이 위주로 돌아가는 지원이의 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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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사람들

  • 한슬 | 취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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