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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한슬
에디터 한슬
·
2021-08-18
탈시설: 당신 곁에 살 권리

발달장애인을 위한 ‘통역’ 같은 거죠

수어, 점자처럼 발달장애인을 위한 소통 수단을 만듭니다

장애
탈시설
정보접근성
발달장애
쉬운정보

에디터의 말:

사회적기업 소소한소통이 만든 굿즈. 발달장애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녹아 있다.
사회적기업 소소한소통이 만든 굿즈. 발달장애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녹아 있다.

곰이 목욕하는 곰탕. 손을 뒤로 돌려서 뒷북치기. 고양이가 세수를 하면 고양이세수. 발달장애인을 위한 쉬운 정보를 만드는 사회적기업 '소소한소통'에서 받은 엽서와 공책에 그려진 그림이에요.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관용어구가 발달장애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고 해요. 저도 어렸을 때는 곰탕에 소고기가 아니라 곰이 들어가는 줄 알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소소한소통에서는 발달장애가 낯설지 않고 밝은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면 좋겠다는 취지로 이런 굿즈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장애가 있다는 건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비장애인과는 좀 다르게 접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장애를 무능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건, 좀 다른 존재들을 위한 '통역'을 준비하지 않는 불친절한 비장애인 중심적인 사회일지도 몰라요.

발달장애인이 지역 사회를 자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통역'이 필요한지,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에게 물어봤어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 소개해 주세요.

소소한소통은 발달장애인의 주체적인 삶을 위해 '쉬운 정보'를 만들고 있어요. 청각장애인은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고, 시각장애인은 점자로 의사소통하듯이,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정보를 쉽게 바꾸는 작업을 해요. 수화나 점자처럼 장애 특성에 맞는 소통수단인 거예요.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

사람에 따라서 정도는 다 다르지만, 도움을 받으면 일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발달장애인이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제공하는 쉬운 정보는 언어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아주 중증의 발달장애인을 위한 도움은 아니에요. 그런 경우에는 인적 지원, 그러니까 누군가가 설명하고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또 정말 경증의 발달장애인은 모르는 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쉬운 정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고요.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발달장애인들은 쉬운 정보를 제공해주면 조금씩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가 대신해 주거나,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가면 자존감도 자랄 수 있잖아요. 이런 부분이 발달장애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을 4년 동안 활동하며 지켜보고 있어요.

'쉬운 정보',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을까요?

발달장애인이 일상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정보가 있다면 무엇이든 가능해요.

주변 발달장애인들에게 "일상을 살면서 어려운 게 뭐예요?"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어요. 질문 자체가 너무 어려웠던 거죠.

그래서 이렇게 질문을 바꿔 봤어요. "주말에 뭐 했어요?" 자조 모임에서 영화를 보러 가셨다길래, 혼자 영화표를 끊어본 적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대답하시더라고요 "아니요. 그거 어렵지 않아요?" "그럼 영화표를 끊는 법을 쉽게 알려주면 해 보고 싶나요?" "해 보고 싶어요!"

자조 모임: 공통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서로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고 지지하며 돕는 모임.

이런 식으로 주변 발달장애인들이 어려워하는 일상 속의 정보를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어떤 분은 세탁기 사용 설명서가 너무 어렵다, 혼자 세탁기를 쓰고 싶다는 분도 있었고요.

어떤 분은 고용공단에 일자리를 구하려고 갔더니 신청서를 쓰라고 했는데 하나도 몰랐다는 거예요.

고용공단에서는 창구 직원이 설명해주면서 같이 쓰면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건 쉬운 신청서를 보면서 직접 쓰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경험이거든요. 하나하나 설명을 듣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기분이 어떻겠어요. 쉬운 신청서를 주고 그래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는 것과, 애초에 어려운 신청서를 갖다 놓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는 건 다른 거거든요.

그래서 소소한소통에서 '쉬운 근로계약서'를 만들었어요. 발달장애인 중에 일할 수 있는 분들이 많거든요. 실제로 현장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정말 뿌듯해요.

이외에도 지원주택이나 자립생활주택에 들어갈 때 필요한 계약서도 만들고 있어요. 탈시설을 경험한 발달장애인 네 분이 직접 장 보기, 요리하기, 청소하기 등 살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 {"<"}서툴지만 혼자 살아보겠습니다{">"} 를 만들기도 했어요.

몇 달 전에는 이벤트를 열어서 발달장애인, 관련 기관 실무자, 부모님, 이렇게 세 그룹에게 쉽게 만들어 줬으면 하는 정보가 있는지 물어봤어요. 세 그룹이 공통으로 꼽은 것이 배달 앱 사용법이더라고요. 시설을 나와 자립하고, 코로나 때문에 집에 주로 있는데, 배달 앱을 쓰기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장바구니? 바구니가 왜 있지? 뭐부터 눌러야 하지? 종 그림은 뭐지?" 그래서 지금 대표적인 배달 앱 사용법을 만들고 있어요. 8월 안에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에요.

'쉬운 정보'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요?

가장 중요한 점은 두 가지예요. 첫째, 만드는 과정에 당사자가 참여해야 해요. 쉬운 정보를 만든 다음에 반드시 발달장애인들과 함께 어려운 부분이 없는지 확인해요. 감수위원이라고 불러요. 뉴질랜드, 영국처럼 쉬운 정보가 발달한 외국도 이렇게 한다고 해요. 뉴질랜드에서는 '퀄리티 체커(Quality Checker)'라고 부른대요.

때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쉬운 정보를 만들기도 해요. 발달장애인법을 쉬운 정보로 바꿀 때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여럿 모여서 법의 의미를 토론했어요. 마지막에는 법조인들에게 감수도 받고요. 쉬운 근로계약서도 마지막에는 노무사의 감수를 받았어요.

둘째, 기본적으로 한자어, 외래어, 너무 어려운 용어는 빼고 짧게 바꾸려고 하는데요. 외래어더라도 고유명사처럼 자주 사용되는 단어라면 빼지 않고 설명을 덧붙여요. 쉬운 정보는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 목적이니까요. 어려운 단어라고 해도 전부 빼버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발달장애인을 많이 만나고 살아야 해요. 그래야 어디서 어려움을 느끼는지 알 수 있고, 같이 해결할 수 있잖아요.

생각해보면 시설을 나오고 싶은 장애인을 위한 복지제도가 있다고 해도, 장애인이 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비장애인인 제가 취재를 할 때도 법, 제도, 신청 방법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시설에 사는 장애인의 80.1%(2020, 보건복지부 조사)가 발달장애인이라고 해요(2019년, 보건복지부). 가족의 돌봄 부담이 크고, 당사자의 의사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가 아닐까 싶어요.

심지어 "발달장애인은 탈시설을 싫어한다"는 얘기도 더러 들었어요. 하지만 그건 시설을 벗어나서 자유를 갖는 것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과 혼자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요?

여길 나가면 큰일 날 것 같은 거죠. 그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선택할 기회가 필요해요.

시설을 나가면 어떻게 다른지 알려 주고, 정보가 부족하다면 체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나가는 게 아니라, 한 달 살아보고 나서 결정할까요?" 그런 기회를 많이 줬으면 해요.

발달장애인 가족들에게도 몰라서 생기는 두려움이 분명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정말 시설을 나가서 살 수 있을까? 그동안 시설이 해줬던 걸 전부 우리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려 드리고, 또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탈시설이 현실화되지 않을까요. 아무리 지원제도를 갖춘다고 해도, 그걸 알아보는 것부터 다 개인의 몫이 되면 안 되죠.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
소소한소통 백정연 대표.

그러기 위해서는 법 제도도 중요해요. 장애인기본법에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점자, 큰 글자, 자막 해설, 수어를 확보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거든요. 하지만 발달장애인은 언급이 없었어요.

2015년부터 시행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발달장애인법)에는 그 내용이 있어요.

발달장애인법 10조(의사소통 지원) ①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발달장애인의 권리와 의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법령과 각종 복지지원 등 중요한 정책정보를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작성하여 배포하여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의 의무사항을 명확하게 규정했죠.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 대한 제재 조항은 없어요. 그리고 너무 포괄적이라서 아쉬워요. 새로운 서비스에 대한 설명, 신청서, 보도자료… 어떤 법령과 어떤 정책 정보인지,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어요. '이해하기 쉬운 형태'도 어떤 형태인지 명확하지 않죠. 관련 시행령을 보면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하는 기준에 따라'라고 되어 있는데,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소소한소통을 창업하기 전, 발달장애인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는 시기에 1년 2개월 동안 공공기관에서 일하면서 법 시행을 준비했거든요. 그때 발달장애인법 10조를 보면서 '가장 먼저 쉬워져야 하는 건 뭘까?' 생각해봤어요. 그건 바로 발달장애인법인 거죠! 그래서 '반갑다 발달장애인법'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었는데요. 전자책영상으로 된 설명이에요.

저는 정부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발달장애인을 위한 법을 발달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게 바꾸는 것. 그리고 최대한 많은 발달장애인이 볼 수 있게 시설, 센터, 학교, 관련 기관에 뿌려주고요.

어딘가에 놀러 갔을 때 환영하는 의미로 선물을 주는 '웰컴 키트'가 있잖아요. 시설을 나온 발달장애인에게도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게 된 걸 환영합니다." "이렇게 살 수 있어요." 하는 웰컴 키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이야기를 알리고 싶다면!

만든 사람들

  • 한슬
    한슬
    인터뷰, 작성
  • 선욱
    선욱
    촬영

9/0
탈시설: 당신 곁에 살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