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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민
에디터
·
2022-05-02
사랑해서 결혼합니다

부모에게 우리는 '언젠가 결혼할 건데 아직 친구랑 사는 딸들'

[사랑해서 함께 삽니다] "그냥 함께 살고 싶어요, 결혼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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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말

그간 '사랑해서 결혼합니다' 시리즈를 진행했다. 결혼식을 했거나 앞둔 퀴어 커플을 만나 그 결혼이 이성혼과 얼마나 같고 다른지를 살펴봤다.

하지만 모든 커플에게 결혼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함께 살아도 결혼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낄 수도 있고, 각자가 처한 조건 때문에 못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커플의 이야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혼하지 않은 커플 김민선씨와 이지현씨(둘 다 가명)를 만났다. 그들이 만나 동거에 이른 과정을 묻고, 이어서 결혼관과 가족관도 물었다. 결혼이 없어도 관계는 단단할 수 있다는 답을 얻었다.

김민선씨의 이야기: 함께 집을 구하기까지

김민선입니다. 일터에서 지현이를 만났어요. 그때 우린 여성과 퀴어가 많은 직장에서 같이 일했거든요. 직원 회식이 있던 날,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어요. 지현이가 제 눈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전 짧은 머리 여자 좋아해요." 그땐 제 머리가 지금보다 훨씬 짧았거든요. 듣자마자 속으로 '어머 얘 봐라?' 했어요. 지현이는 '노리고' 그렇게 말했고, 저는 '제대로' 알아들은 거죠. 통성명한 지 일주일 됐을 때였어요.

사귄 지 두 달쯤 됐을 때 할머니 집이 비었어요. 그때 딱 지현이가 자기 엄마랑 싸워서 집을 잠깐 나올 명분이 생기는 바람에 같이 살아봤어요. 그땐 둘 다 백수여서 돈만 없었지 할 수 있는 건 다 체험했어요. 밥 해 먹고, 한 침대에서 자고, 청소랑 빨래도 깨끗하게 하면서 같이 사는 맛을 다 봤지요. 그러다 할머니가 돌아오시면서 우리의 도둑 같은 동거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땐 둘 다 경기도에서 살았어요. 각각 동쪽 남쪽 경기도라 서울에서 만나면 밤 열시 무렵이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야 했죠. 헤어지기 싫으니까 어두워지면 야놀자, 에어비앤비 같은 숙소 애플리케이션을 돌려서 근처에서 가장 싸게 묵을 곳을 찾았어요. 데이트 통장을 만들었는데, 만나면 덜 먹고 더 많이 걸어다니면서 그 돈을 숙소에 다 썼어요. 일주일에 두세 번씩 그랬더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차라리 그 돈으로 우리가 월세를 같이 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집을 구했죠. 둘 다 넉넉하지 않으니까 더 싼 곳을 찾아 헤매다가 지금 사는 동네를 발견했어요. 재개발 구역입니다. 서울에선 거기가 가장 싸더라고요. 몇 년 뒤에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올 곳이래요.

지현씨와 민선씨가 손을 잡고 있다. 서로의 손가락에는 커플링이 보인다.

집을 얻었으니 집을 채워야지요. 며칠간 둘이서 깨끗하게 페인트칠을 하고, 매일 당근마켓에 드나들면서 중고 가구를 들였어요. 덕분에 친구를 초대할 만한 공간이 됐어요. 그 모든 게 쉽지는 않았지만 고생이라고 돌아볼 만한 기억은 없어요.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당연하고도 행복한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가까이에 극장이 있어요. 둘이 같이 심야 영화를 보고 걸어서 집에 온 날이 생각나네요. 그 길에서 방금 본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집에 들어와서 같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때 지현이가 그러더라고요. "이제야 실감난다. 우리가 같이 살고 있구나. 행복이 이런 거였네." 저도 똑같이 느꼈어요. 같이 살면서 얻는 기쁨이란 이렇게 사소한 것이더라고요.

동거와 결혼, 그건 같은 것일까요?

요새 닷페이스에서 결혼한 커플을 만나던데, 우리한텐 그런 이야기가 없어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같이 살아요. 결혼한 부부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결혼 생각은 없어요. 부부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냥 동거하는 커플이죠. 우리가 만든 삶에 서로 만족하기에 결혼의 필요를 못 느끼는 상태에 가까워요.

그렇다면 동거와 결혼은 같은 것일까요? 그렇진 않죠.

결혼이든 동거든 가족의 동의가 필요하겠지요. 동거부터 말해볼까요? 저흰 각각 친구랑 산다고 말하면서 집을 나왔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거 결정이 쉬웠어요.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동거에 이른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든 퀴어 커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남성 퀴어 커플의 경우엔 다른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이성애자 커플도 동거를 하지요. 각자 처한 상황과 조건에 따라 느끼는 어려움은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이렇듯 동거에는 각각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누군가의 동거가 더 쉽고 어려웠다고 단언해선 안 될 것 같아요. 저희는 '일반화된 서사'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느끼면서 살아온 존재이기에 그런 일반화가 누군가를 소외시킨다는 것을 잘 알거든요.

밤이다. 야외의 의자에 민선씨와 지현씨가 다소곳이 앉아 있다.
밤이다. 민선씨와 지현씨가 놀이터의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

결혼도 동거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갖는 생각이 다르지 않을까 해요. 동거와 비교하면, 결혼은 헤어지지 않기로 동거보다 강한 법적 약속을 하는 거잖아요? 시간이 흘러서 둘 사이의 신뢰가 무너졌을 때도 제도가 그들을 지켜줄 거고요. 이혼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법적으로 부부 상태가 유지돼요. 그 제도의 특권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건 제도가 아니라 신뢰에 관한 것이에요. 마음이 뜨겁든 식든 지금처럼 서로에게 진실하고 싶어요.

결혼은 당사자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의 결합이라고들 하잖아요? 그게 현실이라지만, 상대의 부모보다 내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삶에서 더 중요하지 않나요? 전 동성혼 법제화보다 생활동반자법 제정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사는 사람을 법적인 가족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결혼을 못 하거나, 안 하는 사람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제도적인 안전망이요.

이지현씨의 이야기: 가족이 모르는 가족

이지현입니다. 닷페이스가 우리를 만나겠다고 했을 때 좀 놀랐어요. 닷페이스에 나가려면 결혼은 둘째 치고, 사회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부모의 지지도 있어야 할 것 같았거든요. 우리한테 가장 어려운 커밍아웃은 가족에게 하는 거예요.

우리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런 거예요. 우린 가족인데, 그 사실을 가족이 몰라요. 이상한 말이죠? 하지만 이게 동거하는 퀴어 커플의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저랑 민선이가 어떤 관계인지 양쪽 부모님이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집을 얻기까지 겪은 일만 봐도 그래요. 제가 대출 신청을 하고, 전세 계약을 했어요. 그럼 대출 승인까지 기다려야 하거든요. 계약은 무를 수 없고, 대출은 안 될 수도 있으니까요. 수없이 서류를 열어봤어요. 절차상 문제가 없는지도 계속 확인했고요. 결국 무사히 집에 들어왔지만, 그 전까지 가장 힘들었던 건 이 불안을 원가족과 나눌 수 없다는 거였어요.

말을 꺼낼 생각조차 못 했어요. 내 이름으로 대출을 받았다는 것도, 그렇게 해서 내 명의로 집을 얻었다는 것도 엄마는 몰라요. 서른 전후에 그렇게 큰일을 치렀는데 지금까지도 제가 민선이 집에 얹혀사는 것으로 알아요.

민선씨와 함께 사는 집에서 대화 중인 지현씨. 단발머리를 하고, 스웨터를 입고 있다.
지현씨가 앉아서 말하고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손을 가슴 높이로 들었다. 스웨터와 청바지를 입고 있다.

저는 '두 집 살림'을 해요. 주말마다 엄마한테 가거든요. 직장이 서울에 있으니까 제가 나와서 사는 것을 이해는 하지만, 엄마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딸의 집은 서울이 아니라 당신이 사는 경기도의 그 집이에요. 제가 서울집에서 민선이랑 밥 지어 먹었다고 했더니 엄마가 이러더라고요. "뭐야, 거기다 살림 차렸어?" 그 말에 서운함이 가득 묻어났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전 움찔해요. 그런데 편견이 나를 지켜주더라고요. 언젠가 술을 마신 밤, 엄마랑 통화하다가 누구랑 있느냐 묻기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여자친구'랑 있다고 말해버렸는데, "아, 친구랑 있다고?" 하면서 안심하셨거든요.

본가에 가는 날엔 커플링부터 빼요. 어쩌다 민선이랑 있었던 일화를 말할 기회가 생기면 주어를 빼고 말해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삶에서 축소하는 거죠.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야 부모가 의심하지 않으니까요. 나의 가족을 가족에게 숨기는 거예요.

그런데 가족이 뭘까요?

민선이네 집도 비슷해요. 민선이는 엄마랑 관계가 좋은 편인데, 다른 모든 얘긴 솔직하게 해도 정체성 얘기는 못 해요. 언젠가 제가 민선이네 집에 다녀간 날, 민선이 엄마가 그랬대요. "지현이 걔 좋은 친구던데, 결혼하면 너 서운해서 어쩌니?"

이래서 우리 둘이 사는 것까진 쉬웠죠. 부모들에게 저희는 언젠가 결혼할 건데 아직 젊어서 친구랑 사는 딸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존재를 숨기면서 살아야 할까요? 우린 늙어서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룸메이트라고 지칭해야 하는 걸까요? 그 변명이 궁해졌을 때가 바로 커밍아웃을 해야 할 시기일까요?

늦은 밤, 놀이터의 쉼터 의자에 앉은 민선씨와 지현씨.
늦은 밤, 놀이터의 쉼터 의자에 앉은 민선씨와 지현씨. 지현씨가 민선씨의 어깨에 기대고 있다. 둘의 맞은편에는 닷페이스 에디터가 보인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보게 되지요. 넷플릭스 영화 <돈룩업>이 떠오르네요. 세상이 멸망하기 직전에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하게 될까를 상상하게 만드는 작품인데, 민선이가 같이 보고는 그러더라고요.

세상이 망할 때, 우린 각자의 집에서 울면서 영상통화를 하겠지. 그때도 우리는 식구들한테 커밍아웃을 못 했을 테니까.

커밍아웃 안 한 퀴어가 그리는 미래는 이렇게 불투명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삶의 동반자를 만났어요. 언제든 이런 고충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죠. 나아가 어떤 상황에 부딪치든, 어떤 어려운 선택을 하게 되든 다 괜찮을 거라고 믿게 만들어주는 사람요. 그런 믿음이 있는 관계라면 결혼하지 않았어도 가족 아닌가요? 이런 관계를 과연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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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사람들

  • 민
    취재, 작성
  • 조아현
    조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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